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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인가 저기 가로등 밑을
오늘은 새우처럼 슬프다
뿔이며 수염이며 가시며 잔뜩 길러 놓았는데 어느 것이 슬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수염에게 물어보니 나는 아니라고 한다 뾰족한 가시에게 물어보니 나도 아니라고 한다 그럼 도대체 누가 슬퍼하고 있는 것인가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전혀 알 길이 없다 살아서 바닥을 기어다니는 사이비 새우 한 마리 온 몸이 슬픈 것이다 누구 시인지 까먹었다. 아시는 분은 댓글을. ―――――――――――――――――――――――――――――――――:)~ 웃고 계십니까
"만일 보편교회의 권위가 나를 이끌어주지 않는다면, 나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투스, 푼다멘투스 서간 반박 中
『아베로에스 저/이재경 역, 결정적 논고』를 읽고……
아베로에스의 논고는 왜 결정적인가? 아베로에스가 “결정적 논고”에서 추구하는 바는 신학에 양립하는(그리고 그 이상의 의미를 담아서) 철학의 자리를 옹호하는 변호다. 아베로에스는 이 변호에서 이런 말을 한다. “철학(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이슬람에 반대되는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다른 말로 하자면 “진리는 진리를 거슬리지 않는다.”는 명제로 풀이할 수 있겠다. 아베로에스가 이 작업물을 결정적이라 이름한 것은 스스로 신학(이슬람)과 철학을 잘 화해시켰다고 자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베로에스의 이 작업은 그리스적 사유와 헤브라이적 사유를 조화시키려 했던 라틴교부들의 노력을 연상시킨다. 라틴교부시대의 기독교권과 마찬가지로 아베로에스 생전 당시의 이슬람에서는 “서로 판이하게 상이한 靜的인 사유와 動的인 사유간의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아베로에스의 결론은 교부들의 것과 상반되는 입장이다. 철학은 “어떻게 보는가?”가 관건인 학문이다. 그러나 아베로에스는 위의 논쟁들에 결정적인 진단을 내리면서 많은 문제들은 “잘못 보아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는가?”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말한다. 결국 무엇을 어떻게 보던 간에 그 본 것을 잘 말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은 대개 다 거기서 거기다. 보려고만 한다면 모두들 같은 것을 볼 수 있고 또 보게 된다. 사람들은 많은 경우 같은 것을 보고 있지만 말하는 방식이 다른 것 때문에 논쟁이 벌어진다.(물론 보려고 시도조차하지 않는, 혹은 할 수 없는 인간들, 본 것을 쉽게 잊어버리는 인간들의 오류 때문에 벌어지는 논쟁도 있다.) “좀더 감명을 받은 측면”, “유비적 표현으로 인한 문제”,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두 가지 입장이 단지 선호의 문제” 등등. 이와 같은 아베로에스의 두 양립하는 주장들이 존재하는 배경에 대한 해석은 그리스 철학을 용납할 수 없었던 신학자들의 입장이 단지 이국적인 사유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한다는 점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아베로에스가 철학의 변호와 더불어 “논고”의 또 다른 주제인 “성서에 대한 철학적 해석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 율법은 그들을 가르칠 만한 다른 방법들을 제공한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또한 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하는 문제다. “적대적인 종파가 이슬람에 생긴 것은 우의적 해석을 잘못 사용했기 때문이다. 율법이 모든 이들로 하여금 들어오라고 불렀던 수단인 문들을 통해 모든 이가 공유하고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고 단지 하나의 방법만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아베로에스는 위의 주장에서 “듣는 이가 제발 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 달라!”고, 그리고 “제발 좀 들리는 말을 편협하게 듣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학문이란 우선 “무엇을 말할 것인가?”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로 귀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정적이라고? 당대의 주류 신학파는 피조물이 지닌 이차적 인과성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동시에 신은 세계의 모든 사건의 유일하면서도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논증했다. 어떤 인과적 문제에 대해서든 그것에 가장 적절한 단 하나의 답변은 신의 의지가 사건을 일어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偶因論을 바탕으로 원인과 결과를 통해 세계의 변화를 연속적인 과정으로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비판하고, 신이 연속적인 순간에 각각 원자들을 새로운 상태로 재창조할 때만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글의 전개와는 상관없는 감상―인과론과 우인론이 그 근원적인 부분에서 닿아 있는 만큼 순수현실태의 창조와 유출이 유사하지 않은가? “진선미자체가 창조를 행했다.”는 의미에서 창조란 일회적이고 지속적일 수밖에 없다. 순수현실태인 신의 창조설이 유출설과 유사한 그만큼, 창조란 운명적인 것이 아닌가? 의식의 정화가 필요한 내용들은 상당히 많다. 제대로 말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형이상학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아베로에스가 철학이 신학보다 탁월하다고 든 나름대로의 “결정적” 이유는 신학자는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가질 수 없는 통념에 기초한 전제에서 출발하는 변증술적 추론만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因果의 부정은 논증 또한 통념에 지나지 않게 만든다. 왜 통념이 진정한 학문이 될 수 없다고 하는가? 그것으로 신학에 비한 철학의 탁월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형이상의 영역에서 그 둘은 그리 달라보이지는 않는데 말이다. 그러나 불확실한 텍스트 앞에서 철학의 결정적이지 않은 모습을 이야기 하면서도 아베로에스는 철학이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가장 탁월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아베로에스와 라틴교부들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 밖에도 딴지 걸 수 있는 문제는 많다. “수동이성과 능동이성이 과연 실질적으로 구분이 가능한가?”, “지성적 영혼과 감각적 영혼을 구분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단지 이해를 돕기 위한 표현상의 구분이 아닌가? “과연 지성의 작용이 비물질적 작용인가?” 그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부터가 하나의 통념이 아닌가? 과연 결정적 논고가 실존론과 절망적인 唯名論에서 피어난 회의주의 앞에서 무슨 설득력 있는 변명이 되는가? 오늘날 우리가 꿈꾸는 사이버네틱스(電腦) 기술의 가능성 앞에서 아베로에스의 결정적 논고가 과연 결정적일 수 있을까? 言語道斷이다. 무언가를 설득력 있게 말하기란 정말 어렵다. 세련된 하나의 설명을 하나 붙이면 그것이 덮어주지 못하는 헤아릴 수 없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생긴다. 방에 촛불을 밝히면 생기는 그림자처럼 말이다. 형광등 아래서도 생기는 그림자다. 태양이 그렇게 타오르는데도 우주공간에는 얼마나 많은 그림자가 존재하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아베로에스가 주장하는 지성단일론, 그 이상적인 토론의 가설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반박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막음날-농담으로 마감날이라고 부르지만서두-이 오기까지 “결정적인 논고”는 있을 수 없다. 언제나 그러하듯 결국 결정적인 것이란 “무엇을 믿었는가.”하는 그것뿐이다. [인상깊은구절] “철학과 신학은 상이한 방식을 사용할지라도 동일한 실재와 연관되어 있다. 철학과 신학이 그러한 실재를 기술하기 위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만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면, 상이한 사상 체계는 불필요하다. 오직 하나의 진리만 있을지라도 그 진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근될 수 있으며, 철학과 신학은 상이한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재경님의 해제. -하나의 세계가 철학과 신학에서 영원한 세계와 유한한 세계라는 상이한 언어로 이야기된다는 말이다. ―――――――――――――――――――――――――――――――――――――――――――――――――――――――――――――――――――――――――――――――――――――――――― 1학년 멋모를 때 쓴 리뷰. 블로깅할게 없어 이딴걸.. 크윽. 요즘 쓴 글들은 부끄러워서 못올리겠다. 적어도 초년생은 불민함의 변이라도 되지… 요즘은 글쓰는 것이 무섭다. 아니 글 보여주는 것이 무섭다. 아. 정말 언어도단이다.
글은 안써지지. 시험기간이지. 레포트는 밀리지. 축제는 다가오지 조피디님은 대본 수정하라고 압박들어오지..
암것도 하기 싫다. 으아아아아아악! 책을 읽고 싶습니다! 그냥 재밌는 책을! …겸양범식군과 행복에 쩔어있고, 오덩쿤은 자기혐오에 쩔어있지? 이 안일한 녀석들. ~~~~~~~~~~~~~~~~~~~~~~~~~~~~~~~~~~~~~:)~
바스코 포바, 작은 상자 그때 나는 몇 살이었을까? 예닐곱 살쯤이었다고 여겨진다. 어느 한 그루의 보리수 그늘 아래 가만히 누워 구름 한점 없는 하늘에 눈을 던지고 있다가 나는 문득 그 하늘이 기우뚱하더니 허공 속으로 송두리째 삼켜져 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내가 처음 느낀 無의 인상이었다. 그 인상은 어떤 풍부하고 충만한 생존의 인상에 바로 잇따라 느끼게 된 것이었기에 더욱 생생했다. 그후, 나는 왜 한 가지는 다른 한 가지에 잇따라 나타나는 것인가를 알려고 애를 써왔다. 몸과 혼으로 알려 하지 않고 지능으로 알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가지는 잘못된 생각으로 인하여 나는 이것이야말로 철학자들이 <악의 문제>라고 부르는 바로 그 현상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보다 더 깊고 더 심각한 문제였다. 내 앞에 나타난 것은 파멸이 아니라 공백이었다. 입을 딱 벌린 그 구멍 속으로 모든 것이, 송두리째 모른 것이 삼켜져 버릴 판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현실성이란 실로 보잘것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을 되씹어보기 시작했다. <그날부터>라는 말은 적당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은――하여간 내면적인 사건들은――내부의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던 것이 차례차례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나는 확신하고 있는 터이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것이 어느 날이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나는 그냥 살아간다기보다는 왜 사는가에 의문을 품도록 마련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하여간 <덤으로> 살아가도록 마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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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있는거냐? 흠..
by 겸양 at 08/06 덜덜덜.... 그렇군요... .. by 구식구렁이 at 11/06 잘 보면 다리가 떠있는 것을 .. by Lorein at 11/05 하하. 네. 좋아요. 사실 .. by 구식구렁이 at 07/21 홉킨스나 로버트 브라우닝의.. by 다이몬 at 07/21 하하.. 네에 by 구식구렁이 at 07/21 이번에 저 네르브 마크 바뀌.. by 마이니오 at 07/19 오르가니스트가 책꽂이에 있어.. by 박기둥 at 06/01 웹툰의 특성을 가장 잘 이용.. by 현진 at 05/25 ㅜㅜ. 그냥 애닳을 뿐입죠. .. by 구식구렁이 at 05/24 최근 등록된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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